시노사키판 소설 3권 - 트라키아의 하늘과 대지


1

"리프 왕자님, 귀환!"

선발한 기사가, 큰 소리로 외치며 렌스터 성으로 달려왔다.
아르테나를 중심으로 한 중신들이 일제히 자세를 바로잡는다.
발할라에서 율리우스를 물리친 리프는 그란벨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한 세리스와 함께 1년 가까지 각지를 전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란벨 제국을 해체한 세리스·리프 군은 실레지아로 진군했다. 실레지아에는 잔존해 있던 제국군 부대가 많이 남아 있어 그대로는 넘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융그비 가문의 바이겔리터를 중심으로 한 제국군 대부분은 이미 전의를 상실하고 있었지만, 로프트 교단의 부대는 철저한 항전을 시도해 왔다. 이에, 피가 이끄는 천마기사단이 중심이 되어 모국에 남아 있던 기사단과 호응하여 그들을 섬멸했다.
실레지아를 해방시킨 연합군은 쉴 틈도 없이 옛 어거스트리아 대공연합령으로 행헸다.
리프에게 실레이자 원정은 세티의 먼스터 해방에 대한 답례였지만 어거스트리아의 관해서는 난나의 고향 해방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라케시스의 고향인 노디온을 포함한 어거스트리아의 해방은 리프나 델무드가 난나에게 약속한 것이며, 아레스에게는 마검 미스틸테인의 계승자로서 흑기사 헤즐이 세운 왕국의 재건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제국은 서방국가의 통치에는 무관심했고, 어거스트리아와 베르던은 거의 방치에 가까운 상태에 놓여 있었다. 무정부상태는 각 지방의 연대를 없앴고, 각 도시나 촌락 단위의 소국가로 분열되어 그 사이를 도적이 된 집단들이 활개치고 있는 상태였다.
쓰러트려야 할 적의 중추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싸움으로서는 귀찮은 상태였다. 그래서 리프는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 냈다. 왕가의 피를 이어받은 아레스, 델무드, 난나를 중심으로 부대를 셋으로 나누어, 가장자리의 도시부터 차례로 모든 도시에 아레스의 왕권을 인정하게 하자는 것이였다.
노디온을 시작으로 북상해 나간 연합군은, 도중에 도적단을 소탕해 나가면서 곧 온 땅에 질서를 되찾았다.
아레스는 어거스티 왕가를 잇고, 노디온은 델무드가 잇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베르던이 질서를 되찾게 되자, 연합군은 발할라로 개선해 왔다. 그래서 연합군은 해체되었고, 그들 각자 모국의 재건을 위해 귀국하게 되었던 것이다. 세리스는 각 왕국의 주도자들과 개별적으로 작별 인사를 나누며 그들과 영원의 우호를 다짐했다.
부재중인 트라키아를 관리하기 위해 먼저 아르테나를 귀국시킨 리프도 난나를 데리고 세리스에게 작별인사를 고했다.
각국과 오랜 우호를 나눈 리프는, 780년이 끝나갈 무렵이자 그란벨 침공을 떠난 지 2년만에 귀국한 것이다.
신 트라키아 왕국 사람들에게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왕자의 귀환이었다. 그야 그란벨, 실레지아, 어거스트리아 등등, 유그드랄 대륙 대부분의 나라를 제국의 지배로부터 해방한 영웅의 귀환이기도 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리프의 귀환 다름으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럭무럭 자란 그의 정식 즉위와 난나와의 결혼식이었다.
노디온 왕국을 해방시켰을 때, 노디온 성에서 리프와 난나가 정식으로 약혼을 발표했다는 소식은, 파발마를 통해 일찌감찌 트라키아에 와 있었다. 국민은 열광했고, 리프와 난나의 귀환을 매일 애타우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리프가 미란다와 결혼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얼스터의 일부 사람들은, 소란 후의 실망에 의기소침해 있었다. 그러나 정작 미란다 공주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 리프를 기다리지 못하고 가까운 기사 중 한 명에게 사랑에 빠져 중신들은 매일 싸움이 한창이었다. 결국 미란다는 리프의 식전에는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고, 온 나라가 축제로 들떠있는 틈을 타 예의 기사와 함께 도망쳐버린 것이었다.
얼스터의 충신들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와 동시에 더 이상 미란다에 대해 걱정할 필요는 없어졌다. 실질적으로 트라키아는 리프 왕 아래에 통일되었기 때문에 얼스터 왕가도 형해화하는 길 외에는 존속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후세에 수치를 남기지 않기 위해, 같이 도망친 상대 기사의 이름은 정중하게 모든 기록으로부터 말소되었다. 추후 사람들 사이에서 미란다 공주의 상태는 한 때 리프군에서 함께 했던 젊은 기사였다는 소문만 남게 되었다.
미란다가 정치와 사랑 중 사랑을 선택한 시점에서, 코노몰은 기사단에서 은퇴한 상태였다. 중신들이 미란다에 대해 어떻게든 도와달라며 상의하러 왔을 때에도, 공주는 오랫동안 은폐되어 있었으니 그녀를 자유롭게 해 줘야 한다며 나서지 않았다. 얼스터 근교 마을에 정착한 그가 미란다의 도피에 도움을 주었는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이야기를 리프의 귀환으로 되돌리도록 하자.
사람들의 높아진 환호성 소리가 리프 일행이 마침내 렌스터 성에 도달했음을 알린다. 셀피나가 지시하는 악대가 웅장한 나팔 소리를 울린다. 그 소리에 환영을 받으며 리프를 선두로 원정군이 렌스터 성의 정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온다.
백마를 탄 리프는 20세가 넘어 예전과는 몰라보게 어른스러운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 얼굴에서 죽은 큐안의 모습을 보며, 제베이어는 남에게 보이지 않도록 눈물을 훔쳤다.
리프를 재촉하듯 옆으로 나아가는 난나도 라케시스를 방불케 하는 미인으로 성장해 있었다. 조금 수줍은 듯이 리프의 얼굴을 힐끗 보는 모습에 아직 소녀스러움이 남아 있었지만, 이렇게 리프와 나란히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두 사람의 뒤에는 원정길에 동행한 핀과 글레이드가 나란히 말에 타고 있었다. 그 뒤로 로베르트, 알바 등 기사들이 이어진다. 렌스터 정규군인 랜슬리터 외에는 발할라 전투 이후 먼저 트라키아로 귀환해 있었다. 리프의 귀가를 기다리는 동안 각지의 부흥에 종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르테나가 기다리고 있던 장소까지 나아간 리프는 가볍게 말에서 뛰어내렸다. 곧바로 난나에게 손을 뻗어 말에서 내려 준다. 그것을 본 아르테나가 조금은 부러운 듯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자, 리프는 갑자기 달려와 그녀에게 안긴다.

"다녀왔습니다, 누님!"

태평한 리프의 모습에 갑작스레 당황한 아르테나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서 오세요, 리프."

가볍게 동생을 안아주며 아르테나가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 올케가 될 사람도 똑같이 안아준다.

"자, 환영할 준비는 다 되었습니다. 새로워진 렌스터 성으로 갑시다."

아르테나는 리프와 난나의 손을 잡고는 두 사람을 에스코트해 성으로 행헸다.
격렬한 전투로 거의 파괴된 것이나 다름없던 렌스터 성은 리프가 부재중인 사이에 완전히 재건축되어 있었다. 명실상부한 신트라키아 왕국의 수도에 걸맞은 성으로 변모해 있었던 것이다. 트라키아 산맥에서 잘려나온 아름다운 석재가 곳곳에 사용되었고, 렌스터 특유의 꽃과 나무들이 아름답게 정원과 건물들을 장식하고 있었다. 새로운 국가에 걸맞는 새로운 백악의 성이었다.


2

리프 귀환의 흥분도 식지 않은 채, 성은, 아니 온 나라는, 반드시 치러야 할 대관식을 향해서 당연하게도 신이 난 상태였다.
차례대로 내빈들이 렌스터에 모여든다. 그들은, 이번의 성전에서 싸워 온 사람들이었다.
그란벨 왕국에서는 세리스 왕과 왕매 율리아가, 시알피 공국에서는 오이페 공장, 프리지 공국에서는 아서 공장, 융그비 공국에서는 레스터 공작, 도즐 공국에서는 요한 공작이 도착해 있었다. 다른 공작들은 조금 늦게 도착한다고 전해졌다. 이자크에서는 샤난 왕 부부가, 실레지아에서는 세티 왕이, 어거스트리아에서는 아레스 왕과 델무드 공작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다른 초대객들은 차레차레 식전까지는 도착할 예정이었다.

"정말이지, 여러가지로 귀찮은 일이네."

서 있을 위치 등등을 아우구스트에게 여러 가지 주문받고, 리프는 조금 귀찮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일생에 단 한번 있는 일이니까요. 참아 주시기 바랍니다. 애당초, 대관식에 이어 결혼식까지 치르게 되니 리프 님 본인보다 준비하는 뒷 사람들이 더 죽을 맛입니다."

여전한 어조로 말하는 아우그스트의 모습에, 리프는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오늘 내로 내빈분들이 거의 다 오시게 됩니다. 모레면 드디어 본편입니다."

아스벨과 함께 제기 등을 시끄럽게 배치하며, 아우구스트가 말했다. 아까부터 한 번도 멈추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 눈을 돌렸을 때 넘어질까봐 리프가 걱정했을 정도다. 하지만, 그는 때때로 평소의 무뚝뚝한 얼굴을 그만두고 실로 기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드디어, 왕자가 왕이 되시는 날이 오는군요. 이 날을 보고 싶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쯤이었을까요? 렌스터를 되찾았을 때인가, 아니면 제국의 포위를 견뎌냈을 떄인가... 어쨋은 이 아우구스트, 제일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을 겨우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난 구경거리가 아냐."

리프는 쓴웃음을 지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모레에는 마음껏 구경거리가 되셔야지요. 그리고 국민들에게 새 왕의 탄생을 평생의 추억으로 각인시키는 겁니다."

"이런이런, 어쩔 수 없네. 영웅 다음은 왕인가? 쉴 틈도 없잖아."

어떻게든 해 달라고 말하듯이, 리프는 구원을 청하듯 아스벨 쪽을 바라보았다.

"그 다음은 신랑이니까요. 나중에 난나 님과 함꼐 와 주세요. 맹세의 말 연습을 하셔야죠. 그때까지는 대기실에서 쉬어 주세요. 손님에게 보여지니까요."

아스벨에게도 버림받은 리프는 여기에 있으면 무엇을 시킬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듯이, 큰 방으로 도망쳤다. 밖으로 나가자 셀피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리프 님, 저쪽 방에서 그리운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리운 손님?"

셀피나의 말에 은근 기대를 품으며 리프는 재빨리 말해 준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여니, 과연 그 곳에는 그가 기대했던 사람들이 오여 있었다.

"에벨!"

"리프 님, 정말이지, 훌륭해지셔서..."

리프를 껴안으며 옛날 그의 어머니를 대신하던 때의 표정을 지은 에벨이 말했다.

"난나와 결혼하신다면서요. 축하드립니다."

곧바로 할반이 축하의 한마디를 전한다. 그를 비롯하여 그 곳에는 피아나 의용군의 전원이 모여 있었다. 리프보다 일찍 와 있던 난나도 그들과 함께였다.

"꽤 하는데, 이 녀석?"

오신이 리프를 가볍게 쿡쿡 찌르는 흉내를 냈다. 그것을 밀어내긋이 다그다가 불쑥 앞으로 나왔다.

"알겠냐, 리프. 결혼 같은 건 말야..."

"아버지, 아직도 주눅들어선. 정말 꼴불견이야."

갑자기 열띤 얼굴로 리프에게 다가가는 다그다를 보다 못 해 타니아가 불쑥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타니아, 그 배?!"

이상하게 부풀어 오른 타니아의 배를 보고 리프는 당황했다.

"아 이거? 헤헤, 좋겠지. 아이가 들어 있다고."

히죽거리는 오신의 등을 타니아가 힘껏 때렸다.

"아 진짜, 손 좀 적당히 좀 해. 정말이지 집이나 보고 있으라니까, 어슬렁어슬렁 와 가지고는. 정말이지 꼬마가 꼬마를 낳다니..."

"뭐야, 그 말투는!"

"자 자, 둘 다 싸우지 마."

평소와 같은 상태로 맞서기 시작할 것 같은 두 사람을 보고, 황급히 마티가 두 사람 사이로 들어갔다. 덕분에 마티는 두 사람의 싸움에 흠뻑 말려들어 버렸다.

"두 사람은 작년에 결혼했어요. 덕분에 다그다 씨가 갑자기 한심해져셔..."

로난이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흥, 어차피 핀 놈도 곧 나처럼 될 거야."

다그다가 발끈해서 심통을 냈다.

"체념을 모르는 아버지라니까 정말. 곧 손자랑 놀게 해 줄테니 그때까지 참으라고."

타니아와 다그다의 말다툼을 보고 역시 리프는 조금 긴장한다.

"저기, 리프 님 조금 긴장했나 봐. 이제 와서 무서워진 걸까?"

그걸 본 마리타가 살며시 난나에게 귀띔했다.

"에에? 그럴 수가..."

이제 와서 곤란하다는 듯이 난나는 조금 울먹이는 듯한 눈을 하고 리프 쪽을 쳐다보았다. 그것을 보고 리프가 당황한다.

"후후, 행복해 보이네. 안심했어요."

옛 피아나 마을의 친구로 돌아간 듯 모두와 어울리는 리프를 보며 에벨이 싱긋 웃었다.

"맞다. 에벨에게는 중요한 것을 부탁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어. 결혼식에서 에벨이 내 친부모를 대신해 줬으면 좋겠어."

"제게요?"

갑작스런 제안에 에벨이 놀라 자신을 가리켰다.

"핀은 난나의 아버지로 참석하니까 내겐 아무도 없어. 아우구스트는 진행하느라 바쁘다고 하고, 아무리 그래도 아스벨에게 부탁할 수도 없고..."

"알겠어요.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기꺼이."

"받아주는구나. 고마워, 에벨."

고개를 끄덕이는 에벨을 보며, 리프는 기쁜 나머지 난나의 손을 잡고 둘이서 다행이라며 몇 번이나 반복했다.



3

그리하여, 리프의 대관식과 결혼식 당일이 되었다.
성의 응접실에는 초대받은 사람들이 아름답게 차려입고 모여 있다. 말석에는 서민들이 빌린 의례용 망토를 걸치고 줄을 서 있다. 흰색 바탕에 금테가 달린 케이프 모양의 짧은 망토는, 이를 걸치고 있는 인물들에 따라 꽤나 뒤죽박죽해 보인다. 그래도 적당히 키를 맞춰서 늘어서도록 하면, 그 나름대로 모양이 되는 것이다. 안쪽에 있는 사람일수록 신분이 높아져, 인물도 복장도 호화롭게 되어 간다. 제일 안쪽에는 리프와 난나의 후견인으로서 핀과 에벨이 있다.
중앙에는 붉은 융단이 임시로 만들어진 제단을 향해 곧게 뻗어 있다.
적당한 시점을 맞춰 아우구스트가 세세하게 전령에게 지시를 내린다. 이윽고, 장엄한 오르간 소리가 넓은 방 안에 울려 퍼진다.
대문이 좌우로 열리고 주역인 두 사람이 나타난다.
리프는, 금색과 은색의 실로 꿰멘 흰 복장을 걸치고 있다. 상의 위에, 한층 더 희고 얇은 하프 망토를 오른쪽 어깨로부터 왼쪽 어깨로 푹 찌르듯이 걸치고 있다. 허리에는 넓은 보라색 새시를 두르고, 의례용 레이피어를 왼쪽에 차고, 양손에는 흰 장갑을 끼고 있다. 그 얼굴은 전쟁터에서보다도 더 긴장에 굳어 있다.
난나는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다. 자세히 보면 여러 겹의 천으로 이루어져 있는 드레스는 정성껏 레이스를 짜내서 만들어진 것으로, 빛이 비춰지며 아름다운 무늬를 그 표면에 떠오르게 한다. 반투명한 베일은 난나의 얼굴을 부드럽게 가렸고, 뒤로는 바닥에 이를 정도로 길게 늘어져, 베일이 바닥에 끌리지 않도록 아이들이 그 천자락을 들어올리고 있다. 베일과 드레스에 달린 진주가 악센트가 되어 부드러운 빛을 발한다. 조용히 걷는 그 모습은 넓게 퍼진 드레스로 인해 그 안이 보이지 않는 탓인지, 마치 융단 위를 천천히 미끄러지는 것만 같다. 팔꿈치까지 오는 레이스 장갑을 낀 양손에는, 율리아가 만들어 준 부케가 단단히 쥐여저 있다.
두 사람이 나아가자, 융단 양쪽에 일정 간격으로 늘어서 있던 근위병들이 가로막든 교차하던 창을 세워 길을 터 준다. 오늘을 위해 반짝반짝하게 다듬어져, 앞면에 촘촘히 상감이 새겨진 은및 갑옷을 입은 근위병들은 마치 조각상과도 같은 모습이다. 의례용 창에는 렌스터 왕가의 색인 보라색 띠와 노디온 왕가를 의미하는 녹색 띠가 묶여 있다.
차례차레로 열려가는 창 사이를 통해, 리프와 난나는 제단 앞에 다다른다. 제단 근처에는 왕족들이 모여 있다.
문득 제단의 모습을 본 리프는, 놀라서 약간은 큰 소리를 낼 뻔했다. 그곳에는 게이볼그와 궁니르, 두 창이 짝을 지어 장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리프 왕자와 난나 공주의 결혼식 및 신 트라키아 왕국 초대 국왕의 즉위식을 시작합니다."

두 사람 앞에 선 사이아스가 드높게 선언한다. 리프는 어쩔 수 없이 수수께끼 풀이는 뒤로 미루기로 한다. 왕관을 리프에게 하사한다는 큰 역할을 세리스에게 제의받은 사이아스가 엄숙하게 식을 진행해 간다.
리프 일행과 헤어진 후 사이아스는 브라기 탑에 신탁을 받으러 갔다. 자신은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는 줄곧 거부해 온 파라의 성흔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성흔을 얻기 위해 어머니 아이다는 만프로이에게 살해당했기에, 그는 줄곧 성흔을 미워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출생 자체를 저주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브라기 탑에서 신탁을 받은 그는, 도망치는 것을 그만두고 자신에 운명에 정면으로 맞서기로 선택했다.
그러나 그가 브라기 탑에 틀어박혀 신탁을 얻으려 하는 동안 세상은 변해 버렸다. 제국은 쓰러졌고 그의 목숨을 노리는 로프트 교단도 없어졌다. 사이아스는 그런 세상을 만든 세리스를 만나보기로 했다.
기탄없이 신상을 밝히는 사이아스에게 세리스 왕은 과거의 오이페와 레빈과 같은 예감을 느꼈다. 그래서 세리스는 사이아스를 그란벨의 궁정사제로서 자신의 아래 두려고 했던 것이었다. 젊은 세리스의 인품에 심취한 사이아스도 그의 말을 받들어 발할라에 머물기로 했다.
리프와 난나가 앞에 서자, 사이아스는 먼저 두 사람의 결혼식부터 치렀다. 리프가 국왕이 된다는 것은 난나도 왕비가 된다는 것이다. 리프 왕자가 난나 공주와 결혼한 후에 즉위한다면, 둘이서 함께 즉위식을 치르게 된다. 하지만 리프 왕자가 즉위한 후 결혼한다면, 다시 한 번 난나의 대관식을 치러야 한다. 특별 절차로는 어느 쪽이든 상관 없지만, 흐름의 부드러움을 위해 대관식은 두 사람이 동시에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무사히 식은 진행되어 갔고, 리프가 난나의 베일을 들어올렸을 때, 회장 안에서 희미한 탄식이 일제히 새어 나온다.

"아름답네."

마츄아는 난나를 바라보며 무심코 말한다.
베일 아래에서 드러난 난나의 얼굴은 아름다웠던 것이다. 머리를 올리고 연지를 바른 얼굴은 이미 어른의 것이고, 은빛 귀걸이와 진주 목걸이가 그녀가 가진 기품을 끝없이 높여주고 있다. 그리고 난나의 이마에는, 그 날 리프가 선물했던 티아라가 빛나고 있다.

"너도 곧 저럴게 될 수 있을 거야."

옆에 있던 브라이튼이 그렇게 말하며 마츄아의 머리를 자신 쪽으로 끌어와 안아 주었다.

"에벨이 저렇게 예쁜 사람이었나?"

사람들과는 별개로, 리피스는 어안이 벙벙했다.

결혼하는 두 사람의 부모를 대신해, 핀과 에벨이 단상 위의 그들의 좌우에 줄지어 있는 사람들로부터 한 걸음 제단에 가까운 곳에 서 있다. 핀은 랜슬리터의 공식 의례복을 늠름하게 몸에 걸치고 있다. 마찬가지로 에벨도 리프 쪽에 서 있었지만, 그녀를 아는 사람이 보면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흉갑을 입고 아무렇게나 머리를 뒤로 묶고 있던 평소의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눈가에 아직 강건함이 남아 있지만, 아름답게 빗어넘긴 금발은 풍성하게 물결치고, 여위고 날씬해 보이는 몸매는 자뭇 고귀한 태생인 것처럼 보인다. 옅은 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그 모습은 과거 핀이 이야기했던 브리기드보다는 그녀의 쌍둥이 여동생인 에딘과 더 가까워 보인다.
여러가지 놀라움이 교차하는 가운데, 식은 담담하게 진행되어 간다.

"렌스터의 리프 왕자여. 그대, 노디온의 난나 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일 것을 맹세하는가?"

"맹세합니다."

"노디온의 난나 공주여. 그대, 렌스터의 리프 왕자를 남편으로 인정하겠다고 맹세하는가?"

"맹세합니다."

"브라기의 이름으로, 여기에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사이아스가 드높게 선언한다.
서로 영원한 사랑을 다짐하며 리프와 난나는 입을 맞춘다.



4

"사라 님, 어떻게 하실 겁니까?"

들판에서 물끄러미 한낮의 달을 올려다보고 있는 사라를 알아본 세일럼이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냐."

사라는 조용히 고개를 떨어트려 슬그머니 시선을 발 아래로 향했다.

"리프 님 말씀이신가요? 이제 막 트라키아로 돌아오셨으니, 곧 여기에도 오실 겁니다. 제가 약속드리겠습니다."

사라를 격려하듯 세일럼이 말했다. 지금쯤은, 렌스터성에서 리프와 난나의 결혼식이 한창일 것이었다. 축하할 수 없었던 탓인지, 아니면 리프를 향한 사모 때문인지, 사라는 외로웠을 것이었다.

"응, 분명히 리프는 와 줄 거야. 분명히. 나는 알 수 있어."

그렇게 말하며 사라는 귀를 기울였다.



5

"리프 국왕 폐하 만세! 난나 왕비 폐하 만세!"

넓은 방에 사람들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황금 왕관을 쓴 리프는 보라색의 두꺼운 망토를 걸치고 왕홀을 손에 들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같은 의장에 한층 작은 관을 쓴 난나는 주홍색 망토를 걸치고 다소곳하게 남편의 뒤를 따랐다.
다시 두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통일된 신 트라키아 왕국 최초의 왕과 왕비가 탄생한 것이었다. 사람들의 기쁨은 이제 최고조에 달했다.

"어휴. 피곤하지 않았어, 난나?"

겨우 개인실로 도망쳐 온 리프가 긴 의자에 깊숙히 앉으면서 말했다. 이미 둘 다 결혼식용 의상에서 평상시의 움직이기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아니오, 괜찮아요. 그... 여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둘러보고 난 후 난나는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라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고 리프도 이유없이 연쇄반응적으로 얼굴을 붉혔다.
두 사람이 소꿉놀이 같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그들의 친척들이 줄줄히 찾아왔다. 아르테나, 아레스, 델무드, 세리스, 율리아가 모여 있었다. 그들이 두 사람의 의붓형제 또는 친척이 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면, 꽤 괜찮은 조합인 것 같기도 했다.

"축하해, 예뻤어."

"감사합니다, 형수님."

아르테나에게 축하를 받고 자신도 모르게 난나가 눈물을 글썽였다.

"이런, 벌써 난나를 울린 거야? 그녀를 슬프게 하면 무서운 오빠가 뭘 할지 모른다고?"

아레스가 반쯤 놀림조로 리프에게 말했다.

"아레스 님, 무섭게 할 필요는 없잖아요."

율리아와 아르티나에게 오해를 살 만한 말은 하지 말아 달라고 델무드가 아레스에게 대꾸했다.

"괜찮아요, 귀여운 올케를 울린다면 내가 가만두지 않겠어요."

난나를 가볍게 안은 채, 아르테나가 보증했다.

"잠깐만, 내 편은 아무도 없는 거야?"

갑자기 고립된 리프가 모두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런 것 같네요."

"세리스 님까지... 검의 맹세를 주고받은 사이잖아요?"

"으음, 곤란하네."

어떻게 하면 좋겠냐며, 세리스는 일부러 율리아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율리아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요. 전 울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리프 님은 저를 울리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아요."

혼자서 리프를 감싸는 난나에게 아레스 일행은 무심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런, 결혼했으면서 리프 님이라고 부르는 건 아니지. 뭔가 좋은 호칭이라도 생각헤 줘야 하나?"

"그럴 수가, 마음대로 결정하지 말아 주세요."

"아니야, 이건 널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고."

마음대로 단정지으며, 아레스는 델무드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리프를 부를 호칭을 이것저것 생각하기 시작했다. 평소 무뚝뚝한 아레스의 성격을 생각했을 때, 이렇게 수다스러운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역시, 뭐라고 해도 난나의 결혼은 그로서도 매우 기쁜 일인 것 같다.

"그런데 누님, 궁니르 말입니다만..."

어중간하게 물어봤다간 역효과만 날 거라고 생각한 리프는, 알테나를 붙잡고 살며시 물었다.

"그건 딘이 가져다 준 거에요. 리프와 난나의 맑은 날에, 트라키아의 보물과도 같은 성스러운 창이 하나만 있으면 외로울 거라며 아리온이 딘을 통해 전달했다고 해요."

"그렇다면 아리온이 가져온 것이 아니었습니까?"

"네, 그는 더 이상 공석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로 결심한 것 같아요."

"그럴 필요는 없는데..."

싸웠던 과거는 과거로 남겨 두고, 트라키아의 부흥을 위해 힘을 보태주면 좋겠다고 리프는 생각했다.

"기다릴 수 밖에 없겠죠."

"누님..."

힘들었겠다는 말을 리프는 그대로 삼켰다. 아르테나의 눈이 더 이상 이 일을 언급하지 말라고 호소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궁니르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딘이 방금 가져갔어요."

리프의 물음에 아르테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6

"잠시만요, 딘 맞죠? 기다려 주세요!"

리프 일행이 퇴장한 뒤, 익숙한 사람의 그림자를 본 리노안은 필사적으로 그 뒤를 쫓았다. 그리하여 렌스터 성 발코니에서 겨우 그를 따라잡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리노안의 맞은편에서 대답하지 않고, 부지런히 궁니르를 비룡의 안장에 묶기 시작했다.

"왜 대답하지 않는 거에요?"

북받쳐 오는 감정에 리노안은 등 뒤에서 딘을 끌어안았다. 전사로서의 그의 두꺼운 가슴팍을 등에서부터 감싼 그녀의 두 손의 손가락 끝이 간신히 맞닿았다.

"저리 가 주지 않겠나? 리노안. 나는 이제 가야 한다."

딘이 움직임을 멈추고 말했다.

"싫어요. 계속 곁에 있어 달라고 했는데, 왜 갑자기 타라에서 사라졌는지 그 이유를 알려주기 전에는 놓지 않겠어요."

뿌리쳐질 거라는 생각에 리노안은 팔에 혼신의 힘을 실었다. 하지만 딘은 그러지 않았다.

"나는 계속 곁에 있겠다고 약속한 기억은 없다. 당분간 옆에 있겠다고 약속했던 거다."

"그렇다고는 해도,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나다니 너무해요."

그렇게 말하며 리노안은 기억을 곱씹었다. 옛 트라키아 왕국이 멸망하고 타라가 그 지배에서 해방된 날, 딘은 그녀와 함께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리프 일행이 그란벨 제국을 무너트린 지 조금 이후의 어느 날, 그는 홀연히 리노안 앞에서 자취를 감춘 것이었다.
리노안으로서는, 작별인사도 하지 않고 떠나버린 딘에게 적어도 그 이유만큼은 들어 보고 싶다고 계속 생각해 왔다. 그리고 오늘 뜻하지 않게 그와 재회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리노안. 너는 일찍이 나를 위해 타라를 버리겠다고 했다."

딘이 뒤돌아보지 않고 등에 매달린 리노안에게 말했다.

"네."

"만일 내가 네 입장이라면, 나는 타라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나는 지금도 당신을 선택할 거에요. 그것이, 그게 안 된다는 건가요?"

리노안에 물음에 딘이 말없이 대답했다.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때에 따라서, 무엇을 손으로 잡을지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잡지 못한 것을 다시 잡을 수 있을 가능성은 적다.

"그렇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 당신을 손에 넣을 수 있을까요?"

딘의 등에 뺨을 붙인 채로 리노안이 말했다. 의와 사랑. 그것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왜 사랑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일까? 남자란 왜 그렇게까지 의를 고집하는 것일까?

"오늘 나는 아리온 님의 명령으로 이곳에 왔다. 궁니르를 빌려주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을 가지고 돌아가는 길이다. 알겠나, 리노안?"

"당신은 창이 아니에요."

딘이 의도하는 바를 읽고 리노안은 대답했다. 원래 그는 리노안을 지키기 위해 아리온이 보낸 기사였다. 처음부터 그가 리노안을 좋아해서 지켜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계기가 무엇이었든, 지금의 리노안에게는 그밖에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총명하구나. 그런 점을 나는 좋아한다."

처음으로 딘이 미소지었다.

"딘."

마지막 말, 좋아한다는 그 말을 마음속으로 곱씹으며 리노안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렇게 쉽게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내는데, 왜 행동은 그렇지 못한 걸까 하고 조금 토라져 보고 싶었다.

"나는 아리안 님께 돌아간다. 돌아가면 임무는 끝난다. 그 다음은 나의 자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딘."

그렇다면 자신에게 돌아와주는 것일까, 생각하며 리노안은 다시 그의 이름을 달콤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는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리노안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설령 리노안이라도, 나를 속박할 순 없다. 내가 만나러 가고 싶을 떄만 타라에 갈 것이다."

리노안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가만히 그를 껴안은 채로 있을 뿐이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리노안."

딘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리노안은 머뭇거리며 딘을 풀어주었다. 가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반드시, 다시 와 주시는 거죠?"

"그래, 언젠가는 말이지."

간청하듯 올려다보는 리노안을 한 번 바라보고 딘은 비룡에 올라탔다.
날개가 펼쳐지고, 날갯짓과 함께 바람이 내리친다.
가볍게 떠오른 딘은 트라키아의 하늘로 날아올랐다.
몇 걸음 물러선 리노안은 흐트러닌 머리를 한 손으로 잡아누르며 딘을 배웅했다.



7

핀의 부름을 받고 리프와 난나는 셋이서만 별실에 있었다. 세리스 일행은 아직 조금 전의 방에서 즐겁게 대화하고 있다.

"리프 폐하, 난나 폐하,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핀은 신하로서 깊이 두 사람에게 경례했다.

"고마워 핀. 하지만 우리들끼리 있을 땐 그런 딱딱한 행동은 그만둬 줘."

"그래요, 아버님. 당신은 아버지와도 다름없는 사람이에요. 아들과 딸로서 평범하게 대해 주세요."

다른 사람이 없을 때까지도 격식을 차릴 필요는 없다며, 두 사람은 조금 곤란한 듯한 얼굴을 했다. 그런 점이 핀 답다면 핀 다웠지만.

"저를 지금까지와 다름없이 난나라고 불러 주세요."

"아니, 그렇게는 안 됩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신다면, 지금까지처럼 하도록 하죠."

난나의 말에 핀은 그렇게 대답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핀?"

두 사람만 불러낸 이유를 리프가 물었다.

"부탁이 있습니다. 제게 조금만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무슨 일이야?"

핀의 말에 리프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

"쉬고 싶다는 것이라면, 그건 당장이라도 괜찮아요. 우리들 때문에 많이 피곤하셨을 테니까요. 저기, 여보."

핀이 원하는 대로 휴가를 주자며 난나가 리프를 돌아보았다.

"아니, 단순한 휴가라면 이런 식으로 말하진 않겠지. 핀, 무슨 일 있어?"

핀이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결의를 간파한 리프가 그에게 물었다.

"아뇨, 아무 일도 없기 때문에 시간을 내려고 했습니다."

핀은 어딘가 맑아진 얼굴로 대답했어. 어떻게 된 것일까 하고 리프와 난나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리프 님이 태어나신 이래, 저는 큐안 님으로부터 리프 님을 지키도록 명 받았습니다. 렌스터 낙성에서는, 보호자로서, 단 한 명의 기사로서, 그리고 아버지 대신으로서 게속 그렇게 있으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난나, 당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라케시스를 지키면서 당신도 딸로서 사랑하고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핀은 담담하게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 말 하나하나에 리프와 난나는 그가 갖은 고생을 거쳐 두 사람을 지켜주고 키워준 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로 핀이 없었다면 지금의 두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두 분은 훌륭하게 성장하셔서 오늘 좋은 날을 맞이했습니다. 신하로서, 아버지로서 이보다 더 기쁜 일은 없습니다. 지금의 제가 있는 것도 두 분이 계셨기 떄문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핀은 다시 한 번 두 사람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아냐, 머리를 들어 줘 핀.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 사람은 우리 쪽이야."

"그래요, 아버님. 당신 덕분에 우리들은 오늘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리프와 난나는 황급히 핀의 머리를 들었다.

"아니오, 두 분의 존재가 없었다면 저는 생각지도 못한 채 큐안 님과 에슬린 님과 함께 목숨을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분면 그랬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게는 두 분이 계셨습니다. 그리서 저는 저를 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감사의 말을 해도 부족합니다. 두 분을 지킨다는 사명이 저를 크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이제야 어깨를 내려놓을 때가 왔습니다."

"설마, 그 나이에 편안히 은거한다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역시 그건 아닙니다."

약간 농담조인 리프에 말에 핀은 태평하게 웃엇다. 리프를 지키기 위해 웃는 것조차 잊고 무턱대고 싸워 온 기사의 최고의 미소였다.

"하지만 더 이상 제 힘은 리프 님에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아. 아직 핀은 내 힘이 되어주지 않으면 곤란해."

"물론 리프 님이 제 힘을 필요로 하신다면, 이 생명 자유롭게 사용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이제 리프 님은 과거 제 품에 계셨던 작은 리프 님이 아닙니다. 한 사람으로 훌륭하게 살아가는 트라키아의 국왕입니다. 당신을 키운다는 제 사명은 일단 끝났습니다."

안심한 듯 핀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힘을 뺐다.

"하지만 저는 제 사명을 고집한 나머지, 한 여인을 슬프게 했습니다."

난나를 돌아보며 핀은 말했다.

"어머님 말씀이신가요......"

난나가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고 핀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셀피나에게도 혼났습니다. 리프 님만 보고 라케시스 님을 소홀히 했다고. 확실히 그 당시의 저는 그랬던 것 같습니다. 자신의 사명에만 눈이 멀어 사랑하는 사람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아버님."

핀의 말에 난나는 기쁜 듯 울먹였다. 리프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끌어당기며 만족스럽다는 듯이 핀을 보았다.

"난나의 지금 말에 부끄럽지 않도록, 그리고 제 마음에 부끄럽지 않도록 저는 저를 위해 살아보려 합니다. 레빈 님이 델무드 님께 그녀는 살아 있다고 단언하셨다고 합니다. 신비한 힘을 가진 레빈 님이 하신 말씀이니, 저는 믿습니다. 게다가 예전에 저는 라케시스와 약속했습니다.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반드시 찾으러 갈 것이라고. 저는 그 약속을 이행할 겁니다."

핀은 자신있게 여행의 목적을 말했다. 더 이상 곁으로 속일 수도, 진짜 마음을 숨길 필요도 없었다.

"핀, 당신은 이제 자유야. 나에게도, 난나에게도 얽매일 필요 없어. 네 뜻대로 행동해 줘.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막지 않을 거야."

"네, 감사합니다. 리프 님."

기대했던 말을 듣고 핀은 얼굴을 빛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조금 걱정스러운 듯 난나가 물었다.

"우선은 이드 마을을 향하려 합니다. 모든 것은 그 다음입니다."

핀은 대답했다. 라케시스의 소식이 끊긴 것은 이드 사막에서였다. 사막에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오아시스 마을 이드로 향하는 것은 당연할 선택일 것이다.

"그렇다면 저도."

말을 건내는 난나의 어깨를 리프가 가볍게 두드렸다.

"너는 여기 남아야 해. 핀을 방해해선 안 돼."

반문하려던 난나는 그 말을 삼켰다. 라케시스를 찾는 여행이라면 누구보다도 난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다. 오빠 델무드와도 안정되면 함께 어머니를 찾기로 약속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난나의 여행이지 핀의 여행이 아니다. 핀의 여행에 그녀가 따라가서 그를 속박하면 안 된다. 핀은 그녀가 이제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다고 단언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아버지를 졸업하지 못하면 언제 하겠는가?

"난나에게는 할 일이 있을 겁니다. 괜찮습니다, 저는 반드시 돌아올 겁니다."

핀은 난나에게 약속했다. 그 약속은 그가 빈손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의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언제 출발할 거야?"

리프가 재차 물었다.

"이미 여행 준비는 끝났습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지금 당장 출발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나 갑작스레..."

그렇게 말하는 동시에, 리프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핀은 갑자기 떠나려는 것이 아니라, 리프와 난나의 결혼식을 지켜보기 위해 여행을 연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알겠어. 기사 핀. 귀공에게 직무를 떠나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을 허락한다."

리프가 정식으로 핀에게 전달했다.

"예, 감사드립니다."

다시 한 번, 핀이 두 사람에게 경례한다.

"뜻대로 하도록. 우리는 당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겠어."

"조심하세요, 아버님."

두 사람의 배웅을 받으며 핀은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에 정직해지기 위해 혼자 여행을 떠났다. 그것은 그 자신을 위한 여행의 시작이었다.



8

하늘은 맑아지고, 시작을 느껴지게 하는 바람이 힘차게 하늘을 흐른다.
렌스터 성의 한 점에서 작은 점이 하나 움직이는가 하더니, 그것은 순식간에 크게 상공으로 올라갔다.

"딘인가? 어때, 축제 소동은 벌써 끝났나?"

렌스터 성의 아득한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아리온은 이제 혼자 남은 충신인 딘을 보고 물었다.

"아무 탈 없습니다."

짧게 딘이 대답했다.

"그렇군. 그런데 왜 너는 돌아왔지? 그대로 리프에게 궁니르를 헌상하고 리노안의 곁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것도 시사했을 터인데?"

바보 같은 놈이라고, 아리온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오. 저는 아리온 님의 부하입니다. 당신의 앞날을 지켜볼 때까지는 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바보 같은 소릴. 이런 내게 새삼스레 충의를 표해서 뭐 하겠어? 뭐 됐어. 좋을 대로 해라. 조만간 네 눈도 뜨이겠지. 가자, 딘."

"예, 아리온 님."

두 사람이 날개를 기울이며 트라키아 산맥을 향해 하늘을 가른다.
그 아득한 아래 렌스터의 대문으로부터, 한 기의 여행자가 트라키아 대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옅게 흙먼지를 일으키며 먼 서쪽을 향해 나아간다.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듯 트라키아의 하늘과 대지는 어디까지나 끝없이 펼쳐져 있다.